그 시작은 고약했으나-파란만장푸켓기 제1탄

2006년 4월 6일 새벽 4시 40분, 푸켓의 여름을 만끽하겠노라고 셔링 민소매에 카디건만 걸친 나(알고 보니 뉴스지기 우람도 최악의 정예군 중 하나였다)로서는 서릿발 차가운 공기에 곳곳 뼈마디가 쑤셨다. 게다가 첫 공항버스까지 놓쳐버리다니… 끙, 평소에 마을버스와 맞먹는 속도로 걷는 나로서도 새벽 텅 빈 도로를 무심히도 쌩 하니 밟아버리는 버스의 뒤꽁무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면의 죽상은 금세 사라져 춘삼월의 꽃보다 환한 화색이 돌았으니, 나는 오늘 푸켓으로 떠나는 자유의 몸이지 않은가. 게다가 MBC 드라마 「궁」의 황태자 주지훈이 화보촬영 차 오늘 발리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 온다고 하니,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아싸!

그렇다. 그때까지는 사지 미끈하다 못해 찬란한 주지훈을 잘만 하면 상하좌우로 쓰읍 질질질 훑는 쾌거를 거두고서 푸켓행 비행기에 장엄히 몸을 실으리라 생각하고 “아싸, 왓싸!”를 연발했다. 우리의 푸켓기에 시발이 될 오리엔탈타이 항공이 정비 관계로 현지에서 뜨지 않아 출발시간이 지연됐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뿔.사. 원래 출발시간이었던 오전 9시 15에서 우리는 열두 시간 하고도 네 시간이 지나서야 오리엔탈타이 항공인지 오리무중타이 항공인지를 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많은 고민을 했다. 공항에서 제공하는 호텔로 가서 잠을 잘 것인가, 가까운 시내로 나가서 영화나 볼 것인가, 전 일정을 취소하고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공항에서 뒹굴기’를 선택했다. 일단 면세점으로 가서 아이쇼핑을 하고 밥 먹고 화장실 가고, TV를 보면서 매니큐어 바르고 또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웹서핑하다가 또또 밥 먹고 화장실 가고….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금쪽같은 시간 속에서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던 우리에게 그 ‘시간 죽이기’란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무작정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는 날은 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팀장님과 강 대리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뒹굴뒹굴 하면서 그들도 나처럼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그 풋풋한 초심(初心)을 회상해봤으리라. 그로부터 다사다난한 가운데 울고 웃고 건투했던 오랜 시간들을…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꿈과 낭만의 섬 푸켓으로! 좋아, 가는 거야!”



“싸왓디 캅(카)?”
‘안녕하세요?’라는 태국말이다. 끝에다가 남성은 ‘캅’을, 여성을 ‘카’를 붙인다. 현지 시각으로 오전 7시 30분, 우리는 어느 시골 버스 정류장처럼 다정한 정취를 풍기는 푸켓 공항에서 태국인 가이드와 운전사 아저씨 그리고 우리나라 가이드 언니를 만나 “싸왓디 캅(카)?” 하고 첫인사를 나눴다. 공항을 나섰을 때 지루한 추위에 겨울 내내 ‘투덜이스머프’가 된 나로서는 “끼야홋!” 하고 벌써부터 환성을 쏘아 올렸다. 그 모습은 가히 청정자연의 원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리라. 그 후끈한 자연의 열기가 꽁꽁 얼어붙었던 내 심신을 짜릿하게 해동시켰으므로.
일단 우리는 숙소였던 수린비치 리조트로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샤워를 끝낸 뒤에 ‘코끼리트레킹’을 하러 나섰다. 사흘의 일정이 이틀로 축소된 판이었으므로 짧고도 긴 여행을 즐기기 위해 유연한 정신과 빠릿빠릿한 육체가 요구되었다.



“화창한 봄날에 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 태평양 건너갈 때에 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 보고 첫눈에 반해 스리슬쩍 윙크했대요~♬” 코끼리트레킹을 하면서 내내 이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다. 육지와 바다의 청정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푸켓에서 코끼리 아저씨의 등에 올라 울렁울렁 트레킹을 하는 기분? 근심걱정이 없는 지상낙원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황홀경이라고나 할까. 참, 동행한 아줌마 강 대리는 코끼리 털을 하나 뽑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에 솔깃해 용을 썼지만 아쉽게도 실패했다. 정녕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다행이도 뒤에 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과연 통과했을까?




다음으로 우리는 ‘씨카누’를 타고 섬의 다채로운 동굴이나 군락을 이룬 식물들이 빽빽한 밀림 등 곳곳을 탐험했다. 특히 씨카누 아저씨들의 기똥찬 한국어 실력으로 안내를 받으면서 말이다. 처음 건네는 말이 “안녕하삼?”이라니,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콧구멍, 콧구멍!” 하기에 돌아보니, 동굴 벽에 콧구멍처럼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선인장, 선인장!” 해서 위로 올려다보니, 동굴 벽 사이사이에 뿌리를 내린 선인장이 그 풍운의 초록가시를 뽐내고 있었다. 또한 “망둥이, 망둥이!” 하면서 손짓하기에 강을 내려다보니, 갈색빛이 감도는 망둥이가 KBS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오프닝에서 사지를 팔랑이며 뛰어오는 목도리도마뱀처럼 방정맞게 헤엄치다가 나무에 찰싹 달라붙었다. 가히 압권은 씨카누 아저씨가 씨익 쪼개면서 어딘가를 가리키더니 “유방, 유방!”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 손끝을 따라가 보니, 정말로 여성의 가슴처럼 생긴 두 개의 섬이 봉긋 솟아있는 게 아닌가.
얼굴도 모르고 인종도 다른 사람들이 씨카누를 타고서 오고 가며 웃음을 띠우고 손을 흔드는 모습, 자연 그대로의 자연에 감탄을 자아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유럽인들을 태운 건너편의 씨카누 아저씨가 스르륵 지나가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재미있삼?”



이곳은 ‘팡아만’이다. 1974년 작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의 촬영지였기에 일명 제임스본드 섬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는 본드걸이 아니라 꼭 피터팬 섬의 시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은 과연 낙원이라 칭할 만했다. 배에서 내려 좁은 길을 들어서니 섬의 이름이 씌어진 푯말 뒤로 바다 한가운데에 바위섬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바위섬을 들어올리는 듯한 유치한 포즈로 사진을 찍으면서 깔깔깔 웃어젖혔다. 찰랑찰랑 잔잔한 바다 소리를 들으며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나무를 타면서도 낄낄낄, 나루터를 잇는 긴 다리 위를 망둥이처럼 팔랑팔랑 뛰어다니면서도 연신 호호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서 우리는 피터팬 섬의 나이를 먹지 않는 어린이였다. 물론 돌아 나오는 길에 세속적인 생각을 잠깐 품었노라고 고백하련다, 이렇게. ‘본드걸의 몸매로 다시 찾아주지. 낄낄낄.’



참, 강 대리의 아들 낳기 두 번째 관문이 이곳에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동굴 벽에 손가락 두 개쯤 들어가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것에만 의지해 3초만 서 있으면 아들 낳기 성공이라고 했다. 강 대리, 애썼소, 축하하오. 그런데 나는, 미혼인 주제에 위대한 근력으로 한 15초는 견딘 것 같은데, 그럼 대체 몇을 낳아야 하는 건지…?





이쯤 되면 금강산도 식후경, 이슬람식 해선요리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가 간 곳은 ‘수상가옥’이었다. 그곳은 마치 율 브린너가 나왔던 「왕과 나」의 별채 같았다고나 할까?





새우와 게살요리 그리고 도미처럼 생긴 생선 등등 바다의 생물을 먹고 바다의 향기를 머금으며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출발 전에 인천공항에서 함께 광분했던 아주머니 무리를 만났는데, 옵션은 뭘 선택했냐는 둥 숙소는 좋으냐는 둥 연거푸 물어대시는 통에 잠시 일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다음 코스는 라마6세 거리에 있는 ‘젬스 갤러리’였는데,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 원래 실내에서는 촬영이 금지되기도 했거니와, 그곳에 전시된 보석 특히 영롱한 진주에 완전히 필 받아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진주의 섬 푸켓답에 알탱이가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다채롭게 세팅된 진주가 사람을 어찌나 홀딱 홀려버리던지. 젬스 갤러리는 보석을 가공하고 판매하는 보석 공장 겸 보석상으로, 오색찬란한 보석을 굳이 구매하지 않더라도 눈요기만으로 충분한 곳이다.
뉘엿뉘엿 푸켓의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젬스 갤러리에서 나온 우리는 광란의 도가니인 ‘싸이먼쇼’, 그 문화적인 충격을 감내하기에 앞서 다시 원기를 보충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찾은 곳이 일식 뷔페레스토랑 ‘오이시’, 그곳에서 각종 씨푸드에 딤섬까지 포식의 나래를 펼쳤다.




‘싸이먼쇼’, 푸켓 게이들의 버라이어티쇼! 정말, 버라이어티하다 못해 초절정화끈 공연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이 다 돌아갈 지경이었다. 쭉쭉빵빵의 게이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서 춤과 립싱크 노래로 열정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푸켓을 자주 찾는 국가의 관광객들을 위해 그 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춤도 췄는데, 우리는 아리랑에 부채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야시시한 옷을 입고서 객석으로 내려와 자신의 가슴팍에 유럽인 아저씨의 얼굴을 파묻은 돌발 게이도 있었다. VIP석에 앉은 우리는 무대 위의 게이들과 종종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들(?)은 윙크까지 날렸다. 대체 어떤 리액션을 보여야 하는 것인지 몰라 우리는 넋을 잃은 채 박수만 쳐대고 있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게이들은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고 팁을 받기 위해 입구에 쭉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애정공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추파를 받았으니 사진 한 번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점찍은 게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정화되지 않은 그 걸쭉함에 흠칫! 또 다시 충격이었다.



그렇게, 푸켓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하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뉴스지기 우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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