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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명 : 수(数)가 되고 싶었던 황제
저   자 : 엔만지 지로 출판사 :
분   류 : 언   어 :
분   량 : 194 발행일 : 2010년 8월

▣Short Summary 
“한자로 쓰인 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각각의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로 주인공은 “한자로 쓰인 수”라는 점 이외에 공통의 깊은 주제는 아니다. 마음에 드는 부분부터 읽고 조금 시간을 두고 읽거나, 마음에 드는 부분에서 그만 읽어도 상관없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제국 군주는 어째서 스스로 “수”가 되고, 후계자도 “수”가 되도록 명령했는가?
“한자로 쓰인 수”가 만들어 낸 28가지 고금의 이야기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제국 군주는 어째서 스스로 “수”가 되고, 후계자도 “수”가 되도록 명령했는가? 다자이(太宰)는 어째서 『후가쿠 백경(富嶽百景)』에서 후지 산의 꼭지각을 측정했는가? 항우는 살아남은 부하에게 알려주었다. 한자는 무한의 저편으로......
“한자로 쓰인 수”가 만들어 낸 28가지 고금의 이야기로 구성된 편안한 읽을거리다. 다만, 하나의 이야기를 다 읽을 때마다 자신의 삶이나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일본 문학과 중국 문학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기도 한다. 독특한 독서 안내서로서도 활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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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엔만지 지로
1967년 효고현 출생.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 근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와 한일(漢日)사전 등의 편집을 담당했다. 현재 프리랜서 편집자 겸 작가로 활동 중.
저서로는 <인명용 한자의 전후사>, <쇼와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자들>, <상용한자의 사건부>, <마음에 스며드는 사자성어>, <다자이 오사무의 사자숙어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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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시작하며
제1장 “수”와 “한자”의 사이
〇 이치야이치야니히토미고로 (一夜一夜に人見ごろ: 루트2의 근사값인 1.41421356를 외우는 곡조 혹은 가락) - 숫자에 음이 비슷한 말을 넣어 만드는 유희
〇 구사일생, 거의 - 수를 나타내는 한자의 음독
〇 가로 막대기 4개로 「4」가 되지 않는다 - 수를 나타내는 한자 구성
〇 억은 10만, 조는 10억 - 자릿수를 나타내는 한자
〇 카즈오(一雄)씨와 카즈코(一雄)씨 - 「카즈」라고 읽는 여러 가지 한자
〇 100만 엔인가? 100엔인가? - 한자 숫자와 계산용 숫자
〇 기구한 운명하에 - 「수(数)」를 「사쿠」라고 읽는 경우
〇 행복과 불행의 수 -「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제2장 한자로 쓰인 “수”
〇 백발삼천장 (百髪三千丈)- 수를 다루는 천재시인, 이백
〇 십오일 밤 가운데 새로운 달 빛이요 - 백낙천의 아름다운 대구(対句)
〇 1,000일 밤의 끝 - 『사신기』의 선생담
〇 왕자는 500년마다 나타난다 - 맹자의 자부심과 실의
〇 9만 리라는 높은 곳 - “상대성의 함정”과 장자
〇 1234567 - 시인 료칸은 무심의 공을 차다
〇 8월 10일에 죽은 부인 - 『우게쓰모노가타리(雨月物語)』의 “그날”
〇 동서 124도, 남북 117도 - 다자이오사무(太宰治) 손에는 각도기가

제3장 제국의 흥망 속에서
〇 수가 되고 싶었던 황제 - 시황제가 거부했던 것
〇 28의 리얼리티 - 죽음을 앞 둔 항우가 생각했던 것
〇 4개의 점, 6마리의 말 - 무제(武帝)는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〇 일곱 걸음 사이의 즐거움 - 조씨 형제의 골육상쟁

제4장 “셀 수 있는 것”이란 것은
〇 셀 수 있는 한자는 52만 6천 5백 개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원고료 계산
〇 한자를 “수”로 환원하다 - 획수에 따른 성명 판단
〇 한자에 번호를 매겼던 남자 - 사카에다 타케이(栄田猛猪)『대자전(大字典)』의 최대 고심
〇 사람을 “수”로 바꾸는 마법 - 1963년 등번호 후보사건
〇 수가 될 수 없는 몸을 탄식하다 -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길이 될 수 없는 사랑
〇 수를 셀 수 있는 종교인들 - 『호죠키(方丈記)』의 기원
〇 무한 저편으로의 여행 - 한자는 대체 몇 개가 있는 것인가?

주요참고문헌
끝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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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 번역
〇 수가 되고 싶었던 황제 - 시황제가 거부했던 것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세웠던 것은 역사상 전례 없는 확실한 제국이었다.
천지개벽 이후 최초 3황 · 5제라고 불리던 성인들이 통치했던 시대였으며, 그 후 하 · 은· 주 세 개의 왕조가 이어졌다고 중국 고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주 왕조도 차례로 쇠퇴하고 기원전 550년 정도에 이민족 침입에 의해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400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일컫는 자도 나타나 주나라 왕의 권위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다양한 나라가 할거하여 다툼을 반복하는 시대가 몇 세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에 종지부를 찍었던 이가 시황제였다.
주나라까지의 왕조들은 중국의 모든 국토를 실제로 지배하지 못했다. 각지에서 지방정권이 독자적인 법률과 독자적인 군대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며 자치를 하였다. 「왕」은 그 대표로서 추대받고 지방 정권의 이해 조정을 맡고는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왕조 본연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 왕조는 중국 전 국토를 직할지로서 지배했다. 광대한 대지에서 사는 모든 사람이 단 한 하나의 법 체계, 하나의 군사조직, 하나의 징세 시스템하에 있었으며 그 정점에 시황제가 군림하고 있었다. 진이라는 왕조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상 최초의 “중화제국” 이었다.
「황제」라는 칭호도 “제국”의 탄생과 함께 고안된 것이다. 성을 「영(嬴)」, 이름을「정(政)」이라 했던 시황제는 「진왕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제국의 군주에게 종래에 쓰이던 「왕」이라는 칭호는 부족했다. 그래서 3황 · 5제의 「황」과 「제」를 따서 「황제」라는 칭호를 새롭게 정했던 것이다.
이때 칭호와 관련된 또 한 가지, 그가 바꾸고자 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호」라는 제도였다.
시호란, 군주가 죽은 뒤 자손이나 신하가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 방식이 불만이었다. 자식이 부친의 업적을 평가하고, 신하가 군주에 관해서 의논하게 되는 방식에 대해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라며 부정했었다고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적혀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짐(제왕의 자칭)은 시황제이다. 2세대, 3세대부터 천만세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영원히 전달하리라.

자신이 「시황제」로 불렸기 때문에 후에는 「2세 황제」, 「3세 황제」로 계속될 것이며 천 세대도 만 세대도 영원히 이 제위와 제국이 전해질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시황제의 제국은 그가 죽은 뒤 이내 붕괴가 시작되었고 「천만 세대」는 커녕 「2세」까지만 전해졌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작성된 『사기』에는 잔혹함까지 묻어난다. 단, 그런 감정과는 별도로 나는 시황제가 재미있는 발상을 하는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타인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기분을 잘 안다. 하물며, 그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다. 그가 죽은 이후에 자손이나 신하로부터 “업적을 평가” 받아야 한다니 정말 싫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호칭을 스스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 발상마저 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선택한 것이 하필이면 「시(始)라니!
「2세대」,「3세대」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면 「시」란 “1”임에 분명하다. 예를 들어 주 왕조의 초대 왕은 「무왕」으로, 이는 그의 무력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의 시호는 「문왕」이었는데, 이는 문명의 기초를 닦아준 최대의 영예를 담아서 바친 칭호였다. 그러나 진 왕정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그런 진지한 호칭이 아니다. 단순히 “첫 번째, 최초”를 나타내는 것 뿐인 「시」인 것이다. 그는 어째서 “숫자”가 쓰인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던 것일까?
시황제가 아직 젊었을 때 심취해 있던 동시대 사상가인 한비가 있었다. 그와 학파의 사고관은 『한비자』라는 서적으로 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주도편」에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있다.

군주는 무엇을 원하는 지 겉으로 드러내지 마라. 군주가 무엇을 원하는 지 겉으로 드러 낸다면 신하는 분명히 스스로 고쳐나갈 것이다. 군주는 의견을 드러내지 마라. 군주가 의견을 겉으로 드러낸다면 신하는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군주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신하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굳이 이해시키려 한다면 신하는 분명 군주에 맞추어 자신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군주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모르게 한다. 신하가 알아버린다면 분명 그 의견에 맞추어 자신을 군주에게 잘 보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제국가의 독재군주라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대에 자주 필요한 “리더쉽”도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나타내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은 따르는 자들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없어서 한비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대신에 법을 중히 여기라고 한비는 주장한다. 정해져 있는 법률을 엄격하게 운용하고, 결코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법률에 따른 정확한 상벌을 행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밑에 있는 자들의 “아첨”이나 “속임수”의 길은 닫힌다. 한비는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를 만드는 것은 법을 중시여기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취향을 일절 봉인하고 “법”과 일체화한다. 그것은 “인간”은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세의 지도자란 그 정도까지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아닐까?
사실 「진왕정」은 한비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시황제」의 단계로 뛰어 올라간 것이었다.
적어도 고대 중국에 있어서는 한비는 바람직했다.
아니 자신의 반대쪽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이라도 닮은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것은 “인간”이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요구되지 않을까? - 『한비자』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나는 암울한 생각에 갇혀버렸다.
“업적을 평가하는 일”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평가관을 수반한다. 자신의 개인 사정을 버리고 “법”과 일체화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중화제국을 세웠던 시황제가 타인의 “평가”를 거부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자존심이 높은 제왕이었다. 주 왕조를 열었던 선조 이상의 좋은 “평가”를 얻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평가”에는 “아첨”이나 “속임수” 등 어딘가 미심쩍은 그림자가 늘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그의 냉정함은 간파했던 것이다.
그런 평가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자신을 “평가”하려 했다. 개인의 감정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스스로 호칭을 선택하는 방법으로만 마음에 드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겨진 것은 이 제국을 만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 아니었을까? 최초라는 점, 첫 번째라는 점.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어찌 되었든 간에 말이다. 그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리하여 그는 「시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들에게도 “수”가 되도록 명령했다.